본문 바로가기

터키 여행

터키 여행집 (히포드롬 광장,그랜드 비자르,트로이)|


투르쿠아즈색으로 불리는 청량한 파란색 이즈니크 타일 2만여개로 장식하여 은은한 푸른색을 내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는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BC 479년 플라타이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그리스 동맹군의 승전 기념물델피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워졌던 이 기둥은 AD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장식하기 위해 옮겨왔으며,
본래 세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어 올리고 있던 조형물이었지만 청동 뱀 기둥의 머리 두 개는 제 4차 십자군 전쟁 때 약탈당했고, 마지막 하나 남은 머리는 토프카프 궁전 옆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광장에는 몸뚱아리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을 현지 터키인들은 ‘아트 메이단 (말의 광장)’이라고 부르며 축제일에는 이곳에서 큰 행사들이 열린다고함.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고 함.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원래는 BC 1450년,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시스 3세의 유프라테스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이었으나, 1500년이 지난 AD 357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리품으로 가져와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다함. 이후 390년에 다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지금 이 자리로 옮겨졌다고 함.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에 세워진 '콘스탄티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7세에 의해 석회석 돌(높이 32m)로 만들어 기둥표면을 청동으로 덮어씌우고 그 위에 농부와 어부를 새겨 놓았으나 4차 십자군이 들어와 청동을 벗겨 동전 및 무기제조에 사용하였다 함.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주변의 풍경

이스탄불 '히포드롬 광장'주변의 풍경

오벨리스크 하단부에는 다양한 조각을 새긴 받침대가 있는데 조각의 내용은 황제의 자리에서 전차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황제와 가족들, 주요관리, 민중들, 음악가 무용수들 그리고 전차경기를 새긴 부조 물로 장식되어 있

‘빌헬름 2세의 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히포드롬 광장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돔의 안쪽에 모자이크로 처리된 빌헬름 2세와 압둘 하미드 2세의 직인이 찍혀 있어 당시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짐작케 한다

블루 모스크로 들어가는 옆문

블루 모스크의 안쪽 풍경

블루 모스크의 풍경

블루 모스크의 풍경

약 5,000 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비자르'의 풍경

약 5,000 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비자르'의 풍경

약 5,000 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비자르'의 풍경

약 5,000 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비자르'의 풍경

약 5,000 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비자르'의 풍경

이동중 잠시 둘렀던 휴게소 근처의 주유소 ..P 표시는 주유소란 표시랍니다

휴게소에서 소변을 볼려면 1리라(400원) 동전을 줘야 했습니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로 유명한 고대도시 '트로이'로 가기위해 이동중에 휴게소에 둘러 멀리 태국기가 보이기에 담아 봤습니다

'차나칼레'도시 항구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저기 보이는 페리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차나칼레'도시 항구 주변의 풍경

'차나칼레'도시 항구 주변의 풍경

'차나칼레'도시 항구 주변의 풍경

'차나칼레'도시 항구 주변의 풍경

페리를 타고가며 담아본 '차나칼레'도시 주변의 풍경

페리를 타고가며 담아본 '차나칼레'도시 주변의 풍경

페리를 타고가며 담아본 주변의 풍경..이곳 갈매기도 페리를 쫓아다니며 먹을것을 얻고 있더군요..이럴땐 새우깡이 최곤데...

페리를 타고가며 담아본 주변의 풍경

트로이의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근간을 이룬다. 광활한 유적 덕분에 트로이는 고대세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1822년 찰스 맥라렌에 의해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소재지로 밝혀졌으나,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였다. 슐리만과 되르펠트는 주거지가 파괴되어 버린 9개 주요지층의 순서를 밝혀냈다.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던 제7a기는 BC 13세기경 발생한 화재로 파괴되었는데, 아마도 이때의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트로이는 10년에 걸쳐 벌어진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의 실제 장소입니다.

10년간 공성전을 벌여도 함락할 수 없었던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을 무너지게 한것이 바로 이런 트로이 목마입니다 (모형품)


트로이 내부에 물이 흐르게 했던 토관들..

트로이 유적지의 풍경들..

트로이 유적지의 풍경들..

트로이 유적지의 풍경들..

트로이 유적지의 풍경들..

트로이 유적지의 풍경들..

발굴한도시가 몇 번째 도시인지 층층마다 번호로 표시를 해놓았으며 현재는 6번째 도시 모습만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핵토르와 아킬레우스가 결투를 벌였을 드넓은 평원이 보입니다. 옛날에는 바다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퇴적물이 쌓여 농경지가 되었다

성 내부의 길은 이런 대리석으로 놓여진 곳도 있었습니다.

트로이의 성벽

핵토르의 아버비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의 시신을 찾아와 화장을 했다는 장소. 트로이 백성들은 위대한 영웅을 위해  9일동안 장작을 쌓고 10일째 되는 날 이곳에 불을 올려 시신을 화장했다 함


야외 음악당이 였던 장소입니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의 풍경..비수기 인지라 유적지가 좀 썰렁했습니다